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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평화의 섬 오키나와를 가다.

작성자 (사)통일의길 등록일 2018-11-26 조회수 1,012회 댓글수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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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바로보기: http://m.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67

- [참가기] “국제연대? 같은 시공간에서 밥 먹고, 노래하며 애틋함을 나누는 것”

국제평화연대라는 사뭇 거창한 이름으로 대학민주동문회, 전대협동우회, 10.28건대항쟁계승사업회, 한청협동지회, 통일의길 등 단체들의 6월항쟁 세대들이 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 참가단 소속으로 오키나와에서 열리는 ‘복귀 45년 제40회 5.15평화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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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PF 참가단은 한국‧오키나와 연대집회에서 한국의 사드반대투쟁에 대해 보고했다. [이하 사진제공 : 조원호 담쟁이기자]

4~50대의 아줌마, 아저씨들로 구성된 ‘외인부대’, 이른바 6월항쟁 세대들이 오키나와를 간 이유는 촛불항쟁을 넘어 동아시아의 평화도 지켜보자는 담대한 뜻은 전혀 아니었고 일상을 탈출해서 미국의 동아시아 전초기지인 오키나와, 제주와 같은 아픔을 간직한 오키나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옛 조선과 동일한 역사적 길을 걷다 마침내 사라져 버린 류큐왕국의 흔적을 느끼고 싶었던 게 본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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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폭격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류큐왕국의 슈리성을 복원했다.

흔히 슬픈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섬이라고 종종 표현되는 오키나와는 새하얀 구름사이로 비쳐나는 푸르른 하늘, 무더운 아열대 기후에 형형색색의 열대어와 산호초로 뒤덮인 해변은 에메랄드빛으로 눈이 부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너머에는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가혹한 수탈과 태평양전쟁의 마지막에 유일하게 미국과 일본이 지상전을 벌였던 곳으로 미군 1만2천 명, 일본군 10만 명, 오키나와 주민 12만 명 이상이 사망한 처참한 전쟁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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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초로 뒤덮인 바위가 끝없이 이어진 해안에서 미군의 상륙작전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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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텐마 기지를 파고 들 듯이 자리한 사키마 미술관의 ‘오키나와 전의 그림’은 집단자결, 미군함, 피로 물든 바다, 바다에 잠긴 사람들, 미군을 피해 숨었던 자연동굴 등이 전쟁의 참혹함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군정 치하에서 27년을 지내다 1972년 5월15일 일본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지정학적인 이유로 미국의 동아시아 전진기지로서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 현재 섬의 20%가 미군기지로 사용되고 있고 일본의 군사전력의 75%가 오키나와에 집중되어 있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의 평화는 심각하게 위협받고 오키나와 원주민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의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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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정글훈련을 위해 대규모 헬기장 공사 중인 다카에 기지 출입구는 일본 경찰이 지키고 있고 주민들은 그 앞의 천막농성장에서 현장을 감시하고 있다.

이런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해 해마다 5월이 되면 대규모 평화행진이 진행된다. 행진은 1978년에 처음 시작했는데 ‘기지 없는 오키나와’를 구호로 헤노코와 다카에, 후텐마 해병대 기지, 가데나 공군기지 등 주요 미군기지 일대로 나뉘어 나흘 일정으로 행진과 집회로 평화의 소중함을 호소하고 미군기지의 부당함을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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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노코 기지 해변에서 ‘복귀 45년 5.15평화와 생활 사수 오키나와 현민대회’를 마치고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1972년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으로 복귀를 결정한 것은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을 명시한 평화헌법 9조가 있었기 때문인데 아베 정권은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려고 하고 있어 다시는 전쟁의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평화헌법 수호를 위한 투쟁에 누구보다 앞장선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수년간 국제연대활동의 하나로 오키나와 평화행진에 참가했고 올해는 기지네트워크, 프란체스칸 평화학교, 코리아국제평화포럼, 강정마을회, 제주범대위 등에서 40명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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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대회를 마치고 한국 참가자들이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한 후 언론의 요청에 의해 기념촬영을 했다.

한국‧오키나와 연대집회가 ‘바다를 넘어 평화의 손을 잡자’는 슬로건으로 현립박물관에서 개최 되었다. 박물관에서 집회를?

박물관 내의 문화공연장에 300여 참가자들이 모였지만 구호도 없고 투쟁가도 없다. 다만 기지반대 투쟁과 성주 투쟁, 촛불항쟁 등의 경과와 현황을 발표하는 보고가 이어졌고 기념촬영으로 행사를 끝냈다. 한국‧오키나와 연대집회가!

일본에서는 모든 정치행사가 통칭 집회라 표현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생소한 일본의 집회 문화를 경험한터라 살짝 당황하기도 했다.

헤노코 기지 해변에서 개최된 현민대회에는 1천여 참가자가 모였는데 발언자만 19명에 달했다. 사회자까지 더하니 무려 20명, 역대급이다.^^;;

문화행사는 기타, 아코디언 등의 악기로 예닐곱 명이 노래하는 것이 고작인데도 마칠 때까지 흔들림 없이 의연하고 꼿꼿하게 발언을 경청하며 자리를 지키는 일본 참가자들에게는 누구든지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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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로 인해 축축한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연설을 듣고 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참가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편 나하시청 앞에서 평화행진 출정식 도중 일본 우익들의 방송차량이 집회장으로 돌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경찰의 긴급한 조치로 인명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이들의 극단적인 모습에서 우리나라 극우보수들의 미래가 스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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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식이 있던 나하시청 앞 도로 건너편에 있던 우익들의 차량이 차선을 넘어 행사장으로 돌진했다. 운전자는 경찰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 

오키나와에는 전쟁의 고통을 기억하는 수많은 기록과 평화를 기원하는 조형물과 유적이 있다. 그중 하나인 평화기원공원은 미군과 일본군의 최후 격전지인 마부니 언덕에 조성돼 있었다. 이곳에는 전쟁의 참화를 기록한 평화기념관과 강제징용 조선인을 포함한 20여만 명의 희생자의 이름을 기록한 평화의 초석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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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석에는 조선인 희생자도 많이 있는데 출신 지역에 따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분단은 휴전선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평화의 분수대는 원뿔로 형상화한 오키나와에서 흘러내리는 평화의 물이 바다로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 평화가 오기를 희망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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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분수대 중심에는 오키나와가 원뿔 모양의 탑으로 표현되어 있다. 원뿔을 중심으로 아시아지도가 새겨져 있다.

오키나와 평화운동가들은 강제징용이나 위안부로 끌려와 희생당한 조선인을 추모하기 위해 기금을 모아 ‘한의 비(恨의 碑)’를 건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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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강제징용의 생존자인 강인창 선생은 당시의 강제노동과 인권유린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전생을 바쳐 노력했다. 선생의 고향인 경북 영양에도 똑같은 ‘한의 비’가 설치되어 강제징용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선생의 의로운 삶을 기리고 있다.

분수대 너머 절벽으로 이어진 해안에서는 미군을 피해 절벽으로 몰려온 원주민들이 일본군의 강요와 세뇌에 의해 집단 투신을 하였으며 바다는 핏물과 시신으로 뒤덮였다고 한다. 또 박쥐동굴이라 불리는 지하 20m 깊이의 자연동굴에서는 아이들과 여성들을 포함해 1천여 명의 민간인과 일본군이 총칼이 아닌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고 한다. 마치 ‘지슬’의 한 장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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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과의 마지막 전투장인 평화기원공원까지 밀려온 민간인들은 일본군의 강요와 집단 체면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바다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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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등성이에서 10여m를 내려가니 가파르고 좁은 동굴입구가 나왔다. 안은 10여 평 남짓 공간이 여러 곳 있었고, 동굴 초입에서는 일본군이 민간인의 탈출을 막기 위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평화행진의 마지막 코스는 헤노코 기지 인근에서 오키나와 평화활동가가 운영하는 소담하고 작은 카페였다. 그 곳에서 우리들은 함께 소시지와 고기를 굽고, 피자도 직접 만들고 나누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한국 참가자들과 오키나와 평화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먹고 춤과 노래로 서로를 격려하며 기지 없는 오키나와를 기원했다. 비로소 식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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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점심을 오키나와 전통주 아와모리를 곁들여 먹은 후 전통악기인 산신과 북으로 장단으로 노래와 춤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참가자들과 함께 흥겨운 시간을 보내던 중에 토끼풀이 무성한 잔디밭에 앉아 무심코 건낸 눈길에 네잎 클로버가 다가왔다. 난생 처음 네잎 클로버를 만났다.

이건 분명 ‘로또’를 사라는 신의 계시가 분명할 텐데 그곳에는 로또 판매점이 없었다. ㅋㅋ

나는 이 행운이 헤노코와 소성리와 강정마을과 대추리에도 전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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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있는 세상의 모든 곳에 평화만이 가득하기를….

이번 평화행진을 마무리하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연대라는 것은 거창하고 어마어마한 실천이 강제되는 그런 대단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이 밥 먹고, 노래하고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가지는 그런 소박함이 바로 끈끈한 연대가 아닐까? 그렇지! 라며 슬며시 묻고 답해 본다.

헤노코, 강정, 대추리는 소성리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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